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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과거사 복원: 남북한 역사서술에서의 주체

레오니드 A. 페트로프 (Leonid A. Petrov) 호주국립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1.    역사적 연구와 극단적 민족주의

2.    1960년대 북한 역사서술

3.    주체적 역사 서술의 생성

4.    주체역사관과 한반도 통일

 

1968, 맑스주의 변증법의 몇몇 요소와 역사적 물질주의가 민족주의적 원칙인 주체사상과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는 내용의 민족 역사 연구의 새로운 접근법이 북한에서 고안되고 공표되었다. 새로운 접근법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은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황장엽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원시적과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은 계층과 계급이 없는 사회에 기초한다고 가정하고, 역사적인 과정의 초석으로서 계급투쟁의 정통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정은계급 관점으로서가 아닌역사의 주체인 인민 관점에서 비추어야 역사였다.

 

북한 역사학자들이 1967-1968년의 역사서술의 위기로부터 회복되는 데에 10년이 걸렸고, 마침 조선전사”(1979-1982) 북한에서 민족 역사의 주체사상적 접근의 모델로 생기게 되었다. 책의33권중에서18권이 김일성과 그의 가족, 반일 사회주의 국가건설 활동역사에 바쳐졌다. 한국역사를 신석기 시대에서  대한제국의 멸망까지 다룬 다른 15권은 민족역사의 모든 부분을 찬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찬란한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을 통하여 북한의 역사학자들이 내렸던 결론들은 지금 현대 남한에서  매우 유행하게 되었다. 논문은 역사에 대한 극단적 민족주의적 접근의 계보를 검토하고, 한국의 통일과정에 수단으로 쓰이고자 한다.

 

그리고 논문은 북한에서 주체주의의 역사서술의 확립을 분석하고 연구의 결과와 남한 역사학술에서 부활하는 민족통일주의와 비교하기 위함이다. 기간별 북한 역사문학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초창기 역사와 맑스-레닌주의(후에 주체사상으로 바뀜) 공식적인 역사서술과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순점을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것이다. 아래 사용된 자료는 남북한 역사학자들의 글과 주체사상을 창안한 황장엽의 회고록, 저명한 소련 역사학자 Mikhail N. Pak Yurii M. Ryurikov (류학구) 회고록들이 사용되었다. 또한 여러 동료들, 특히 제임스 류이스 (James B. Lewis)교수와 연구를 위해 후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1. 역사적 연구와 극단적 민족주의

 

학자의 , 특히 과학분야에 잘못된 자료를 날조하거나 부정 연구의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적절하지 못하다. 만물의 법칙은 불가피하게도 부정의 정체를 드러내도록 되어있다. 특히 학문분야로서의 역사는 항상 정치와 동반되어 있어 학자들을 방해하는 특별한 유혹을 동반한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현대 역사학자들이 하는 왜곡이나 실수에 대해 반대증언을 수가 없다. 이러한 장애물은  역사적 자료의 빈약함에서 발생하며, 후원자의 강력한 이해관계에 대한 압력이 대개는 너무 강해서 학자들로 하여금 발견을 위조하도록 간절히 원하게 한다. 정치적인 배려나 연구비 상황이 위태로워지면 학자들은 입지가 불확실하게 되며, 대개는 활용 가능한 사실들에 근거한 민첩한 결론을 내리거나, 미리 내린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상황의  갈래 길의 선택에 놓이게 된다.

 

대중을 흡족하게 필요가 있을 경우, 연구자들이 사실을 위조할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는 허다하다. 1928 유명한 문화인류학자 마가래트 메아드 (Margaret Mead) 의해 쓰여진 “Coming of Age in Samoa”(Mead, 1928) 수년간  이루어진 남태평양인들에 대한 연구 가장 최초의 연구로 간주된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연구한 발견내용들의 대부분은 원래부터 만들어진 것이고 거짓말을 것으로 밝혀졌다. Mead 강력한 학자출신의 정치인이였다.  실제로 책이 출판된 10년이 지난 후에만 사실이 밝혀졌고 그녀가 불명예스러워지지도 않았다. Mead 책은 오히려 문화적으로 열등한 비유럽 민족의 신사회 다윈(Darwin)주의적 사고에 부합하는 인종적 전형을 조장했기 때문에 칭송 받았다 (Freeman, 1983).

 

부패한 학자 고결성의 다른 예는 지금 일본에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2003 5 24, 일본 고고학 연합의 특별 연구반은 아홉개 ()에서 162 유적지를 믿지 사실로 규정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고고학자 후지무라 시니치 (Fujimura Shinichi) 연구가 불명예스럽게 되었다. 사립 도호쿠 구석기 연구소의 부원장 후지무라는  츠끼다테조에 있는 가미타가모리 유적지에서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밝혔다. 유적지는70만년 전까지 정착하고 거주했던 것으로 믿어져 왔으며, 구석기시대의 초기나 중기로 추적된다. 그러나 미야기도 정부 관할청에서 열린 충격적인 언론 컨퍼런스에서 후지무라는 그가 소장하고 있던61개의 석기 조각들을 묻었다고 밝혔다(2000 11 6, 요미우리 신문). 석기는 60만년 것으로 알려졌고 미야기도 내의 다른 곳에서 발굴되었다.

 

후지무라는 동료들로 부터 발견을 해내라는 극도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을 위조하였다고 밝히고 사죄하였다(아사히 신문, 2000 11 6). 그가 참여한 발굴 작업 때마다 발견을 이루어낸 기록들은 동료로 하여금신의 이라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후지무라의 발견은 일본 구석기 시대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어떤 전문가는 그의 발견들은고고학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발견 때마다 신문의 앞면을 장식했으며, 이로 인해 일반 일본 고고학자들을 위한 기금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세계 역사가 일본과 함께 인류의 발생부터 새로이 쓰여질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올리는 그러한 재미와 흥미있는 역사를 믿고싶었을 어떤 누구도 제동을 걸고싶지 않았다 (Japan Today, 2003 5 26).

 

만약 그러한 의도적인 위조가자유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면,  철의 장막 뒤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 변경의 규모를 누구나 쉽게 상상할 있다. 역사적 사실의 재구조화는 북한의 역사편찬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고 민족의 과거가 빠르게 변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정세에 맞추어 지도록 시도되었다. 1956년과 1967 사이에 북한에서 역사학술의 발전은 민족주의적 원칙인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완전히 새로운 전통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염원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북한의 통치자들은 한국 역사의 초창기 사건들을 오랜 고대시대의 사건이라 주장하였다. 동시에, 북한 역사학자들은 북방 왕국들의전통적 우월성 강조하고 남방 이웃의 역사적 열등성을 증거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러한 태도는 주체사상 형식의 공산주의 깃발 아래 나라를 통일하는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데에 필수적이었다.

 

            계급투쟁에 고무되어 변경할 없는 과정으로써 역사를 설명하는 것과 사회진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북한 역사학자들은 어떤 맑스주의의 역사적 단계도 그들 자국의 역사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민족 역사는 원시적인 공동의 사회에서 노예소유, 봉건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한국스타일의 사회주의의 승리로 엄연히 이끌어 가는 사회-경제 형성과정에 있어서 주체적인 변동의 순서적인 연속체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문화가 이웃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강조된 반면, 외세의 어떤 유입도 허용될 없다.

 

많은 남한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한국 민족의 발상지는 만주벌판이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역사잡지인역사탐험창간호(월간중앙 6월호 별책부록) 서울대  신용하 명예 교수와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그는 구조선 역사에 관한 그의 발견은 세계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라 주장한다. 함축은 또다시 한반도와 만주가 인류문명의 시원지이며, 최초 문화의 흔적은 터키, 프랑스와 핀란드까지 에서도 발견된다(신용하, 2003:6-9).

 

한국 민족의 진정한 발원지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Lake Baikal)가라는 다른 가정들도 많다.  역사탐험지의 같은 6월호에서 김종록은 바이칼이 시베리아인 샤머니즘의 시원지이고 주민들도 현대의 한국인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한국 민족의 기원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는 분명 동쪽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바이칼에서 만주로 한국으로 마침내 일본으로 움직였던 것이다(김종록, 2003:36-46). , (일본뿐만 아니라) 남한과 북한의 민족의 기원 정착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에서 강력한 유사점을 있는데, 그러한 기원을 고대를 찬란한 것으로 나타내려 시도한다. 의심이 가고 허구성이 보이더라도 활용 가능한 역사적인 사실이 있다면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고대 한국의 영토가 인류 문명의 시원지였다는 주장은 점점 북한과 남한에서 공통적으로 들을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어떠한 자료도 환영 받는다.

 

 

2. 1960년대 북한 역사서술

 

            역사를 계급투쟁 중심으로 보는 맑스-레닌주의 또는 국제공산주의전통의 역사관에서 역사를 주체사상 또는 지도자 중심으로 보는 민족주의적 역사서술로의 급격한 전환은 북한에서 학술 발전의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노동당 중앙 위원회는 사라져가고 있는 다양한 학문적인 의견들 중에서 하나를 공식적인 가설로 선택하고자 한다. 모든 다른 관점은 반당 반혁명으로 금지하고 저자들이 생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역사적인 글에 남아있는 상식은 점차 무기력하게 되었으며, 학술적인 부정에 대한 연쇄반응은 북한 역사 학술을 마침내 1960 암흑의 시대로 몰아넣는다.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형식적으로는 국제공산주의자 맑스-레닌주의에 여전히 남아있지만 1960년대부터 북한 역사학계가 체계적으로 주체사상의 영향에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민족역사에 대한합법칙성 적용하기 위한 방법을 위한 이전 연구가 독특한 민족적 특성의 허식으로 대체되었다. 북한의 역사적인 주기는 민족 역사를 민족주의적 원칙과 주체의식에 따라 구성하기 위해 급격히 새로 쓰기 시작하였다. 한반도가 외세에 의해 점령당했던 한치의 의심도 피하기 위해서 모든 중국에 의해 만들어진 증거나 문화유물들이 북한영토에서 발견되기라도 하면가짜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로 여겨진다(김석형, 1963:5-6 9 20).

 

더욱이 강력한 민족주의와 일제 식민 역사에 대해 보복하기 위하여 일본 영토에 한국령의 땅이 있다는 새로운 가설이 생성되었다(김석형,1963). 논리에 따르면 고조선의 수도이자 평양의 전신인 왕검성의 연구는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963년과 1965 사이에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학자들과의 협력아래 기원전8세기나 7세기로 추정되는 강샹과 로우샹 무덤이 랴오둥 반도에서 발견되었다. 결론은 수도였던 왕검성이 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파 모양의 청동 단검) 유물들이 2개의 중국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시기들이 대략 같았으며  한국의 북쪽에 있는 미송리와 묵방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같은 물품을 소지하고 있었다. (Lee Ki-dong, 1992: 27-28). 

 

제국의 위대함에 대한 열정이 북한 학자들로 하여금 고조선과 그의 신화적인 창시자 단군 역사에 관한 논의를 계속하도록 이끌었다. 1950년도 후반 북경에서 중국 고전을 공부한 역사학자 이지린 논의를 폈다. ‘고조선에 관한 연구라는 그의 책에서 전설적인 국가가 기원전5세기 또는 4세기에 설립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이지린, 1963). 당시, 북한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단군신화에 관한 어떤 역사적인 타당성을 부정하였고 그것을 단지 원시적인 토템이즘 (Totemism) 산물로 다루었다. 예를 들어, 이상호는 이야기가 단지사회경제적인 면에서 가지 중요한 변화를 반영한 인기있는 전설이었다고 단언하였다 (이상호, 1963).

 

김일성의 장남인 김정일과 그의 숙부 김영주 사이에 이루어진 위대한 지도자의 공식적인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위한 열광적인 투쟁에서, 김정일이 우위를 차지하였고 학문에서의 구루(guru) 칭송되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4년간의 대학 교육기간 중에 젊었던 그에 의해 쓰여진 1,400개의 기사와 수필 중에 6개는 민족 역사의 발행물로 기증되었다(이성철과의 인터뷰, 1999). 초기 작업의 하나인삼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 할대에 대하여”(1960)에서 그는 남쪽 왕국 신라는 국가를 통일한 적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7세기 신라는 삼국 영토의 3분의 2만이 법치 아래에 통합하여 나라를 다스렸다(김정일, 1960 10 29). 김정일의 신라에 대한 선입견은 분명히 신라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부재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났다.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분투가 이어지는 동안 신라는 이웃의 백제와 고구려를 압도하기 위해서 중국 당의 군사의 힘을 간청하였다.

 

다른 연구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사회경제적 성격을 옳게 해명할대에 대하여”(1960) 에서 청년 김정일은옛날맑스-레닌주의 역사학자들을 독단주의로 비판하였으며, 만약 백제와 신라를 비교한다면 고구려가 사회 경제적 발달에서 높은 지위를 자랑하였다고 논박한다 (김정일, 1960 10 18, 김정일, 1960 11 10).

 

1963 김정일은 한국에서 구석기시대 문화의 발견에 환호를 보냈다 (김정일, 1963 53).  그리고 1964년에 그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설립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에 설립되었다고 발표하였다(김정일, 1964 2 10, 1964 9 16). 이러한 주장은 북한 지도성이 남한으로 하여금 국가를 통일하는 역사적인 정당성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 하였던 것이다. 십대였던 김정일이 역사 서술적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은 자명하며, 누가 그의 배후에 있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이러한 초기 연구업적은 최근에 김정일 저작집들에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가 개입함으로써 역사적인 학술에 대혼란을 가져왔음은 자명하며 재편성을 하게끔 만들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김일성 일가가 이끄는 추천에 따라 수정되고 교정되지 않은 한국역사에 대한 주제는 없었다. 일제 식민지 기간동안 좌익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이 발달함에 따라 한국 맑스주의 역사가의 기여는 부정되었고옛날사회 경제적사학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철학, 역사학과 경제학의 저명한 학자들은 주체사상에 대한 충성을 표해야만 했다. 서둘러 그렇게 이행하지 않은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분야에 있어서 절대적인 지배의 추구하는 김일성에게 장애물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환경에서 북한의 학자들의 손에 놓인 역사적 사실들은 신화적 담론들의 정치화된 재조작 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적인 해설에   동요하는 단순함은 반일 게릴라로 하여금 사상을 통제하고 정치적인 의견차이를 징후를 탐색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1967 이후 모든 역사서술학적 논쟁은 종료되었고 전문 정기 간행물들의 출판은 중단 되었고 학자들은 순종적인 관료주의자들의 의무만 이행하도록 되었다.

 

 

3. 주체적 역사 서술의 생성

 

북한의 주체사상 이론가들은 북한에서 이데ǻ